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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책방(書房)’이다?

기사승인 [466호] 202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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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한문을 쓰기 시작한 시기는 2천 년 전의 일이다.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발표했으나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급되지 못하고 조선시대 말기까지 주로 한문을 사용해왔다. 필자의 서재에 1970년대 초반에 출판된 책이 여러 권 있는데 명사는 거의 한문으로 되어 있고 부사, 조사, 조동사 등이 한글로 되었다. 그러니까 순수 한글사용은 불과 반세기 남짓한 세월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듯 한문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기 때문에 우리말 단어 75%가 한자어라고 한다. 한자어란 어휘를 한문으로 쓰고 우리말로 읽는 것이다. 예하면 政治, 經濟, 文化라 쓰고 우리말 음독으로 정치, 경제, 문화라고 읽는다. 이러한 쉬운 한자어 단어는 한문표기가 문제되는 것이 없지만 어떤 한자어는 한문표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뚱하게 틀리게 표기하는 경우가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가 남편을 책방이란 뜻의 서방(書房)’으로 표기한 것이다.

 남편이 어떻게 책방인가?

 남한에서는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장가는 한문으로 丈家인데 여자의 집, 즉 처가(妻家)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자의 부모를 장인, 장모라 부르는 것이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말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간다는 뜻이다. 아들이 엄마보고 나 장가 보내줘.’라는 말은 나를 여자 집에 보내달라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혼인이란 여자가 남자 집에 가는 것인데 왜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간다고 말하는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옛날에는 남녀가 혼인하면 남자가 먼저 여자의 집에 가서 살면서 아이 낳고 수년 간 지난 후 다시 처자식을 데리고 남자의 집에 오는 것이 관습이었다. 장가간다는 말은 이러한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남한과 달리 이북과 중국 연변 조선족은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말하지 않고 서방 간다.’고 표현한다. ‘서방 간다에서 서방은 서방임, 서방질하다, 기둥서방 등등의 서방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왜 서방 간다고 말하는 걸까? 이 서방이란 말은 어떻게 유래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방 간다에서 서방은 서쪽을 뜻하는 서방(西方)이며 서방(西方)은 곧 여자가 있는 곳이다.

 자아~, 이제부터 여자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행길에 나서보자!

 중국은 은나라 때부터 오색, 오방, 오행의 관념이 있었으며, 주나라 때부터는 모든 현상을 음양오행설에 꿰맞추고 풀이했다. 따라서 음은 서쪽이고 양은 동쪽이요, 여자는 서쪽이고 남자는 동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고 남자는 왼쪽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남서녀, 남좌우녀(약혼사진과 결혼사진은 반드시 남자는 좌측, 여자는 우측에 위치해야 함)이다

중국역사에서 왕모전설이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왕모는 곧 서왕모이다. 그녀는 동왕공(東王公)과 대응되는 여신이며 장생불로약을 지니고 있다든가, 남자들의 정력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와 로맨스가 있었다든가, 그 유명한 한무제가 77석에 서왕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등등의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 동남서녀 관념에 의해 서방에 위치해 있는 왕모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미화되었으며 유명한 인물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가 꾸며졌다

농경문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남경여직(男耕女織)의 상징이다. 그들이 77석에 은하수에서 만나는데 견우는 동쪽에 위치해 있고 직녀는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77석 날에 만나는가? 그것은 여름에 왕성했던 양기가 음기를 만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214일을 남녀가 선물을 주고받는 정인절(情人節)’로 기념행위가 성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의 발렌타인데이를 수입해서 하는 것으로 서양문화를 마구 숭배하는 숭양미외(崇洋眉外)’의 결과이다. 중국학자들은 마땅히 우리 전통문화에서 유래된 77석을 중국 사람의 정인절(情人節)’로 규정해야 마땅하다고 호소한다.

우리민족도 역사적으로 동남서녀의 관념이 굉장히 뿌리 깊었다. 특히 전설과 민담에 여자가 등장하면 십중팔구는 서방(서쪽)’이 따라서 나타난다.

  우리민족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사서가 두 권 있는데 하나는 1145년 출간된 김부식의삼국사기이고, 다른 하나는 1280년 출간된 김일연의삼국유사이다. 김부식은 고려 중기 유명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였다. 그는 송나라에 가서 3년 간 연수하고 돌아와 사마천의사기편년체를 닮은삼국사기를 지어냈다. 김일연은 국사급 스님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김부식은 조정의 요직에 있던 관료였고 김일연은 스님이라는 이유로삼국사기를 중시한 반면에삼국유사를 아주 가볍게 취급했다. 이런 맥락에 의해 김부식의삼국사기를 정사로, 김일연의삼국유사를 야사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발생했다. 정사로 받들어온 김부식의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가 없는데 비해 김일연의삼국유사에 단군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삼국사기는 왕조 중심의 역사서이고,삼국유사는 왕조연대 기재는 있으나 주로 민간전설을 위주로 기재하였다. 그래서 민속과 관련된 자료가 매우 풍부하다. 여자는 서쪽이라는 기재 역시삼국유사에 엄청 많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등장한 여자와 서쪽에 관한 기록들을 간추려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 노파와 하서지촌(下西知村)

남해왕 때에 가락국해 중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이라 하니 혁거왕(신라초대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다

. 흰닭과 서쪽마을(西里)

영평삼년 경신년 84일 박공이 월성 서쪽마을을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남을 보았다. 자색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또 흰닭(여자를 상징함)이 나무 밑에서 우는지라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 보희와 서악(西岳)

춘추공의 비()는 문명황후 문희니 즉 유신공(庾信公)의 둘째 여동생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이 꿈을 해괴하게 여긴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말했다. 영리한 동생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그 방뇨몽을 산 덕분에 춘추공과 가연을 맺고 왕비가 되었으며 자식을 수두룩하게 낳았다

. 선도성모와 서란산(西鸞山)

신모는 본시 중국제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며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였다. 사소가 부황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은 후 소리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았고 신이 되었다. 그래서 서란산이라 하였다

. 호녀와 서산기슭

신라 원성왕 때 흥륜사를 돌던 김현이 자신을 따라 돌던 한 처녀와 정을 통한 후 그녀를 따라 갔더니 집은 서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 백호광(白毫光)과 서쪽

부득과 박박이 심산계곡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던 어느 날밤 꿈에 백호광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빛 가운데서 금색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지었다. ...... 백호광은 후에 부득과 박박으로 하여금 목욕재계를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한 여자이다.

. 선덕여왕과 서교여근곡(西郊女根谷)

선덕여왕이 영문사 옥문지(玉門池)에 숨어 있는 500명의 백제병이 잠복해 있는 것을 예지하여 소문났다. 신하들이 그 비결을 물었더니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즉 여근(女根:생식기)이니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러므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왕이 말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일곱 가지 이야기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고대우리민족은 여자를 반드시 서쪽에 연계시켜놓았다

또 고대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축제 때 남근과 여음의 모의물 놀이가 있었는데 동쪽에 남자, 서쪽에 여자가 위치해서 놀이를 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혼례식을 치르는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서양식 예식장에서 치르는 것과 전통혼례식이다. 전통혼례식은 신랑이 동쪽에 서고 신부가 서쪽에 서서 서로 마주한다. 사회자는 북쪽에 서는데 사회자를 기준으로 좌측이 동쪽이고 남자가 있고 우측이 서쪽이며 여자가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대 우리민족은 여자는 서쪽, 서쪽은 여자라는 관념이 매우 강하게 또 매우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관념으로부터 남자가 여자를 취()하는 행위(결혼)를 남자가 서쪽, 즉 서방에 가는 것으로 형용되었으며 비유되었다. 따라서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표현하고 갓 결혼한 남자를 서방쟁(북한과 중국연변에서 쓰는 말)’이라 하며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을 한문으로 西方이라고 표기해야 정확하다.

 그렇다면 왜 한국국어사전에 남편을 책방을 뜻하는 書房이라고 표기하는 걸까? 조선시대 과거급제 시험 준비를 위해 서재에 들락거리는 젊은 남자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주장은 순전히 잠꼬대 같은 소리다. 한반도에 과거급제제가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때다. 과거급제제를 중국에서 수입해왔으나 중국과 다른 점이 있다. 중국에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모든 양민이면 전부 시험자격을 부여했다. 물론 양민에는 여자가 배제되어 있어 남자에게만 한정되었던 것이다. 소귀에 책을 걸어놓고 밭을 갈며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농부도 참가자격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한반도에서는 참가자격을 양반의 자제에게만 부여했고 그마저도 서자는 배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과거시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자가 전체 인구의 1%도 안 된다. 그리고 그 시대 과거급제가 아니더라도 공부한 자가 양반가문의 자제 외에는 거의 없었다. 언어란 민중의 삶에서 생성되고 유래되는 것이 상식이다. 한 줌도 안 되는 즉 1%도 안 되는 자들의 공부 모습에서 남편을 책방을 뜻하는 書房으로 표기한다? 아무 설득력이 없는 잠꼬대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필자는 조선조 5백년 유교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영향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김정룡 다가치포럼대표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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