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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25)

기사승인 [447호]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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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촉한의 출중한 재능의 문신들

난세에 필요한 것은 무신들뿐만 아니라 문신들 또한 매우 필요했다. 무신은 주군을 도와 전투에서 이겨서 천하제패에 기여한다. 한편 난세에도 민심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문신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고 천하를 구하는 방책은 문신들 붓끝에서 나온다. 물론 난세에 문무를 겸비한 영웅들도 많았기 때문에 굳이 무신과 문신을 확실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한반도역사에서 김부식이거나 김종서 같은 사람들은 문무를 겸비한 관리들이었다. 중국 삼국시대에도 이런 인문이 많았다. 하지만 어떤 이는 문에는 뛰어나지만 무에 어두울 수 있고, 선비출신이지만 문보다 무에 더 기여한 이도 있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래도 진수와 같은 사학자들은 문신들을 하나의 편으로 묶어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어진 덕행으로 명성을 떨친 허정

 

허정은 인물평가에 뛰어난 허소의 사촌형이다. 허소가 먼저 출세했지만 허정을 배척하여 봉록을 얻을 수 없게 했다. 그래서 허정은 자수성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믿을 것 없는 허정은 덕행을 베푸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허정은 불안한 난세에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손책을 만났다. 손책이 동쪽으로 장강을 건너자 모두 교주로 달아나 난리를 피했다. 허정은 직접 강가에 앉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먼 친척을 먼저 가게 한 뒤에야 비로소 떠났는데 그때 이 모습을 본 사람 가운데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교지에 이르자 교지 태수(交阯太守) 사섭(士燮)이 경의를 가지고 후하게 대우했다. 당시 원휘(袁徽)라는 사람이 상서령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허문휴(문휴는 허정의 자)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훌륭한 선비로서 지모와 책략이 나라의 큰일을 계획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고향을 떠난 뒤로 많은 선비와 함께 행동했는데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으레 다른 사람을 먼저 위하고 자신은 나중에 생각했으며 멀고 가까운 친족들과 굶주림이나 추위를 함께했습니다. 동족에 대한 규율도 인자함이나 용서, 측은히 여김으로 하여 모두 효과가 있었는데 이것을 또 일일이 나열할 수 없습니다.”

익주목 유장이 사자를 보내 허정을 초빙하자 허정은 촉으로 들어갔다. 유장은 허정을 파군 및 광한 태수로 삼았다. 건안 16(211) 허정은 촉군으로 전임되었다. 건안 19(214)에 유비가 촉을 지배하게 되자 허정을 좌장군장사로 삼았다. 그리고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는 허정을 태부로 삼았다. 제에 즉위하여 허정에게 책명을 내렸다.

짐은 대업을 이어 받아 만국의 군주가 되었지만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며 나라를 잘 돌볼 수 없을까 봐 두렵다. 백성끼리 화목하지 않고 가정의 다섯 가지 질서(, , , , 자녀)가 정돈되지 않았으니 그대를 사도(司徒, 지금의 교육부 장관)로 삼겠다. 다섯 가지 가르침, 즉 오교(五敎, , , , , )를 공손히 실행시키되 너그러움을 기본으로 하라.”

허정은 고희 넘은 나이지만 인물을 사랑하여 후진들을 받아들이고 청담을 논의하면서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허정은 장무 2(222)에 세상을 떠났다. 진수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허정은 일찍부터 명예가 있었고 독실하다고 평판을 받았으며 또 인물 추천에 마음을 두었다. 비록 그가 행위나 일을 처리하는 데 모두 타당했던 것은 아니지만 장제는 대체로 조정의 대들보 신하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유비에게 군자금을 투자한 미축

 

<삼국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갓 세상에 뛰어들자 장세평과 소쌍이라는 투자자를 만나 말 50, 금과 은 500, 1천근을 후원받는다.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장이를 찾아가 평소 쓰고 싶었던 무기를 제작한다. 가벼운 검 두 자루가 한 쌍을 이루는 유비의 쌍고검, 관우만이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16킬로그램이 넘는 무게의 청룡언월도, 길이가 약 4미터에 달하고 창날이 뱀의 형상과도 같은 장비의 장팔사모가 드디어 탄생했다. 그리고 삼형제의 기개를 보고 병사 500명이 자진해 모였다고 했다.

이런 기록은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 사서에서는 유비가 군자금으로 첫 투자를 받은 것은 건안 원년(196)의 일이었다. 유비에게 투자한 사람은 미축이었다.

미축은 선조 때부터 재물을 늘려 고용한 사람이 1만 명이나 되고 재산은 억대에 이르는 대부자였다. 유비가 하비를 습격 받아 처자식을 여포에게 포로로 잡혀 있을 때 가장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미축이 여동생을 유비에게 보내 아내가 되게 하고 노비 2천명, 금은 재화를 주어 군자금에 보탰다. 그 무렵 알거지였던 유비는 이에 힘입어 다시 떨쳐 일어나게 되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미축을 영군 태수(贏郡太守), 미축의 동생 미방을 팽성의 상으로 삼도록 했지만 둘 다 관직을 버리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녔다. 여기서 떠돌아다녔다는 표현은 유비가 그때까지도 근거지 하나 없이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였다는 뜻이다. 유비는 형주로 가려고 미축을 보내 유표에게 알리도록 했다.

미축은 온화하고 인정이 많으며 우아하고 대바르지만 사람을 통솔하는 데는 뛰어나지 못해 유비는 미축을 상빈의 예로 대우하면서도 일찍이 군대를 통솔하게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내린 상이나 총애는 그와 비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익주가 평정된 다음에 미축은 안한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제갈량보다 서열이 위였다.

유비는 미축에게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그를 무한 신뢰한 것 같다. 미축의 동생 미방이 남군 태수가 되어 관우와 함께 일했는데 사사로운 불화로 두 마음이 생겨 모반하여 손권을 맞아들였으므로 관우가 이 때문에 패했다. 미축은 직접 미방을 결박하고 처벌을 청했다. 유비는 형죄의 죄는 서로 연루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위로하고 처음처럼 정중하게 대우했다. 미축은 부끄러워하고 노여워하다가 병이 나 1년여 만에 죽었다.

 

   

 유비의 비서실장손건

 

 손건(孫乾)은 자가 공우(公祐)이고 북해군 사람이다. 유비가 서주를 대신 관리할 때 손건을 종사로 삼았으니 유비진영에 일찍이 합류한 셈이다. 그때부터 손건은 유비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오랜 세월 생사를 함께 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미축전에서도 그랬고 손건전에서도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녔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그의 부하들은 조조와 손권의 부하들에 비해 고생을 더 많이 겪었던 것 같다.

유비가 조조를 등졌을 때 손건을 보내 원소와 손을 잡았고 형주로 가려고 할 때 손건이 미축과 함께 유표에게 사자로 가서 모든 일을 유비의 뜻대로 이루었다.

건안 19(214)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건을 종사중랑에서 병충장군(秉忠將軍)이 되었으며 미축 다음으로 대우 받았고 간옹과 동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진수는 손건전의 제목을 유비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고 달았다.

 

   

 유비의 세객 간옹

 

간옹은 탁군 사람으로서 유비와 동향이다. 유비진영에서 장비와 간옹 두 사람이 유비와 고향이 같았다. 간옹은 젊을 때 유비와 왕래가 있었으므로 그를 따라 두루 돌아다녔다. 이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녔다거나, 두루 돌아다녔다는 표현은 유비가 근거지 없이 거지 장군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간옹은 말재주가 뛰어나 언변으로 유비의 천하도모 대업에 기여했다. 유비가 형주에 이르자 간옹은 미축, 손건과 함께 종사중랑이 되었고 늘 세객이었으며 명을 받들어 여러 곳을 오가는 사자 노릇을 했다.

간옹은 여유로운 태도로 풍자하며 논의했는데 성격이 오만하고 구애됨이 없으므로 유비 앞에서도 책상다리를 하고 의자에 기대어 위엄이나 엄숙한 모습은 하나도 없이 제멋대로 했다. 사람들은 간옹의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에 대해 천성이 한국말로 말하자면 싸가지없어 그랬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한편에서는 간옹이 유비와 동향 사람이고 젊었을 때부터 친한 사이어서 허물이 없어 마음대로 했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간옹은 제갈량의 아래 관리들 앞에서는 혼자 긴 의자를 하나 차지해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말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간옹의 사람됨이가 본래 오만방자했던 것 같다.

그 무렵 자연재해가 들어 식량이 부족해서 음주를 금하고 술을 거르는 자를 형벌에 처했다. 가령 집에서 술그릇을 찾아내면 사건을 논의하는 관리는 술을 만든 자와 똑같이 처벌하려고 했다.

간옹이 유비와 산책하다가 남녀 한 쌍이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유비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음탕한 행위를 하려고 하는데 어째서 결박하지 않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대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

간옹이 대답했다.

저들은 음란한 기구를 갖고 있으니 술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유비는 크게 웃으며 술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형벌을 없애버렸다.

진수는 간옹을 이렇게 평하여 말했다.

간옹의 기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절세의 논객 진복

 

진복(秦宓)은 탁월한 문장가이자 절세의 논객이었다. 그의 명성으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유비가 익주를 탈환한 후 익주에서는 진복을 초빙하여 종사좨주(從事祭酒)로 삼았다. 진복은 유비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유비가 제로 일컬은 뒤 동쪽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진복은 하늘의 때가 틀림없이 유리하지 않다고 진언했다. 이 일로 해서 옥에 갇혔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이때의 유비는 아마 이성을 잃은 상태였던 것 같다.

진복은 문장에 뛰어나고 절세의 논객으로 명성을 떨친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유비의 천하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제갈량의 시대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건홍 2(224) 승상 제갈량이 익주목을 겸할 때 진복을 별가로 삼았으며 이어서 좌중랑장, 장수교위로 임명했다.

오나라 명사 장온이 촉을 방문했을 때 진복을 만났다. 장온이 제갈량한테서 진복이 익주의 학자라는 말을 전해 듣고 물었다.

그대는 학문을 했습니까?”

진복이 말했다.

다섯 자 되는 어린이조차 모두 학문을 하거늘 어째서 꼭 저에게 묻습니까?”

장온이 진복의 수준을 떠보려고 물었다.

하늘에는 머리가 있습니까?”

진복이 말했다.

있습니다.”장온이 말했다.

어느 쪽에 있습니까?”

진복이 말했다.

서쪽에 있습니다. <시경>에서 네 머리를 돌려 서쪽을 보라.’라고 했으니 이 구절로 미루어보면 머리는 서쪽에 있습니다.”

장온이 말했다.

하늘에는 귀가 있습니까?”

진복이 말했다.

하늘은 높은 곳에 있으면서 낮은 곳의 소리를 듣습니다. <시경>에서 학은 구고에서 울고 소리는 하늘에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장온이 말했다.

하늘에는 발이 있습니까?”

진복이 말했다.

있습니다. <시경>에서 하늘의 걸음은 어렵구나. 너는 이렇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발이 없다면 어떻게 걷겠습니까?”

장온이 말했다.

하늘에는 성이 있습니까?”

진복이 말했다.

있습니다. 하늘의 성은 유()입니다.”

장온이 말했다.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진복이 대답하여 말했다.

천자의 성이 유이므로 이로써 압니다.”

장온이 말했다.

해는 동쪽에서 태어납니까?”

진복이 말했다.

해는 동쪽에서 태어나지만 서쪽에서 죽습니다.”

진복의 대답이 마치 울림처럼 질문을 따라 곧바로 나오니 이에 장온은 진복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이런 대화는 어찌 보면 말장난 같지만 당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선비들이 서로 상대의 학식과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궁금해 하고, 다른 하나는 이런 대화를 통해 난세에 정신이 억눌려 있고 긴장상태에 있던 신경이 확 풀리면서 쾌락을 맛보는 의미가 컸다.

요즘 전체 대한민국이 트로트에 빠져 쾌락과 행복을 맛보는 것과 같이 당시 선비들은 이런 대화가 마치 재미있는 공연처럼 쾌락의 엔돌피를 산생시켰던 것이다.

김 정 룡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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