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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23)

기사승인 [445호] 202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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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공이 큰 유비의 무신들

유비의 진영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등 다섯 명의 유명한 무신이 있었다. 이 다섯 무신을 진수는 하나의 챕터에 묶어 놓았다. 그런데 필자는 중국인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하나의 편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네 사람을 하나의 편으로 다루기로 했다.

 

   

 

 

최후가 아름답지 못한 장비

<삼국연의>에서는 장비가 첫 회부터 등장한다. 유비와 관우 두 사람을 만나 도원결의를 맺고 황건적과 싸운다. 소설은 또 동탁이 천하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 삼형제가 동탁의 부장 여포와 싸우는 장면도 멋지게 묘사했다. 하여튼 소설은 유비를 주요인물로 다루다 보니 관우와 장비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역사인물로서의 장비는 소설에 나타난 문학인물 장비와 달리 대서특필로 조명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적인 장비는 강냉이 알만하다면 소설에서의 장비는 뻥튀기 되어 과장된 모습이다. 장비는 유비 진영에서 처음부터 줄곧 함께 한 인물이고 또 유비와 동향(同鄕, 탁군) 사람이어서 소설은 더 주목했을 것으로 보인다.

장비가 1만 명을 대적할만한 힘을 가진 굉장한 장수이지만 진수는 장비의 실전 기록을 건안 12(207) 봄에 있었던 장판 전투 상황부터 남겼다. 그 이전에 장비가 뭘 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유비가 조조를 따라 여포를 치고 함께 허도로 돌아왔고 조조가 장비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는 간단하고 함축적인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유비는 조조를 등지고 원소에게 의탁했다가 원소에게로 둥지를 옮긴다. 원소와 조조가 대전을 벌일 임박에 유비는 원소를 등지고 유표한테 도망간다. 유표가 죽자 조조가 형주를 쳤다.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는데 조조는 장판까지 뒤쫓았다. 다급해진 유비는 처자식을 버리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유비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장비에게 기병 스무 명으로 막게 했다. 장비는 냇물을 점거하여 다리를 끊고 황소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잡으며 말했다.

나는 장익덕이다. 나와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

적군은 모두 감히 가까이 다가가는 자가 없었고 이로써 유비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유비가 익주목 유장을 치려고 했으므로 장비와 제갈량 등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누어 각 군과 현을 평정했다. 장비는 강주에 이르러 유장의 부장인 파군 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무찔러 사로잡았다. 장비가 험상 굳은 표정으로 꾸짖어 말했다.

대군이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고 감히 저항하며 싸우느냐?”

엄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신들은 예의도 없고 우리 주를 침략했소. 우리 주에서는 머리를 잘리는 장군만 있을 뿐 항복하는 장군은 없소.”

장비는 화가 나서 측근들에게 끌고 가 머리를 베도록 했지만 엄안은 얼굴빛도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째서 화를 내시는가!”

장비는 엄안의 그 용감함에 감복하여 풀어주고 불러서 빈객으로 삼았다. 엄안도 멋지고 장비 또한 더 멋지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 사건이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까지 장비의 공로가 컸다. 조조는 장로를 무찌르고 하후연과 장합을 시켜 한천에 머물러 지키도록 했다. 장합은 따로 군사를 지휘하여 파서로 내려가 그곳 백성을 한중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장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두 진영은 50여 일 동안이나 대치하고 있었다. 장비는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에서 장합의 군대를 맞아 싸웠는데 장합의 군대는 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으므로 장비에게 크게 패했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단지 부하 10여 명과 산을 따라서 샛길로 물러나 남정으로 돌아갔고 파서지역은 평정을 되찾았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자 장비를 우장군으로 삼고 가절을 주었다.

유비가 황제로 등극한 장무 원년(221) 장비는 거기장군이 되었다가 사예교위를 겸했으며 서향후(西鄕侯, 수도와 경기지역을 다스리는 관리)에 봉해졌다.

장비는 선비출신이 아니다. 의리와 용맹함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의 단점은 관우와 정반대였다. 관우는 병사들을 잘 대해주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오만했고 장비는 군자를 아끼고 존중하지만 소인은 보살피지 않았다. 유비는 장비의 이 점이 늘 걱정되어 말했다.

그대는 형벌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치고 또 매일 병사들을 채찍질하면서 그들을 측근에 임용하고 있으니 이는 화를 부르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깨우치지 못했다. 게다가 매일 술독에 빠져 있어 부하들에게 거칠게 주정이나 부리는 상사였다. 유비가 관우를 잃은 복수를 하려고 오나라를 토벌할 때 장비는 병사 1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閬中)에서 나와 강주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다. 출발하려고 할 때 그 막하의 장수 장달(張達)과 범강(范疆)이 장비를 죽이고 그 머리를 갖고 장강을 따라 손권에게로 달려갔다. 장비 군영의 도독이 표를 올려 이를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 도독의 표가 있음을 듣고 짐작하여 말했다.

! 장비가 주었구나!”

유비, 관우, 장비 이 삼형제는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했다. 비록 이 비장한 결의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강호의 영웅들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왔으면 언제가 이 세상을 떠나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떠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유비는 관우를 잃고 화병에 걸려 무리하게 오나라를 공격했고 이 시점에 장비마저 죽었으니 결국 맘의 병이 심해 죽음이 앞당겨 왔던 것이다. 관우는 적군의 손에 죽었으니 장렬한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두 사람에 비해 장비의 죽음은 그야말로 값이 없는 죽음이었다. 그토록 윗사람을 깍듯이 모시던 그가 아랫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거칠게 갈구고 사람대접을 하지 않아 결국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최후가 아름답지 못했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난세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제 명에 죽지 못한 사례가 많고도 많지만 혹자는 죄를 지어 죽거나 전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장군으로서 최대의 수치이다.

주군에 충성을 다 바치면서 부하에게 포악하여 그들의 손에 죽었으니 장비의 인생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조도 두려워한 마초

  마초가 유비에게 의탁한 것은 건안 19(214)의 일이니 아주 늦게 합류한 셈이었다.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하기 전까지 그는 한수와 더불어 조조에게 큰 걱정거리였으며 눈엣가시였다. 이전에 조조의 군대가 포판(浦阪)에 주둔하며 황하 서쪽 강기슭을 건너려고 할 때 마초는 한수에게 말했다.

위수 북쪽에서 이들을 막는 데는 불과 20일이면 됩니다. 하동의 곡물이 바닥나면 그는 틀림없이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한수가 말했다.

자유롭게 건너도록 합시다. 황하 속에서 고난을 겪게 하는 것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조조는 이것을 듣고 말했다.

마초가 죽지 않는 한 나에게는 묻힐 땅이 없을 것이다.”

조조는 홀로 마초와 한수를 만나 회담했다. 이때 마초가 자신의 강대한 힘을 믿고 몰래 조조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조조 옆에서 장수 허저(許褚)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으므로 감히 행동하지 못했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을 써서 마초와 한수가 서로 의심하게 만들어 크게 패배를 안길 수 있었다. 패배한 마초는 달아나서 융족 지방에 갔다. 거기서 그는 세력을 키워 다시 병주목을 겸하고 양주의 군사를 총괄했다.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 통치하자 각 지역 토착세력들이 마초를 공격하여 진퇴양난에 빠진 마초는 한중으로 달려가 장로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마초는 장로가 함께 일을 꾸미기에 부족한 인물이므로 유장을 포위하고 있는 유비에게 투항했다. 마초가 성 아래에 이르자 성 안에서는 두려워 떨었으며 유장은 곧바로 항복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마초를 평서장군으로 삼고 임저를 다스리도록 했으며 전에 조조가 봉했던 것에 따라 도정후에 봉해졌고, 정무 원년(221) 마초는 표기장군이 되었다가 양주목을 겸했으며 승진하여 태향후(斄鄕候)에 봉해졌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가 어떤 전투에서 어떻게 전공을 세웠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유비가 마초를 후하게 대우해 준 것으로 보아 전공이 컸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마초는 유비와 대화할 때 늘 유비의 자를 불렀다. 관우는 마초의 행위에 불만을 품고 마초를 죽이려고 했다.

유비가 말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돌아오고 있는데 그대들은 화를 내며 내 자를 부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 천하에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러면 그에게 예를 가르치시오.”

다음날 대회의를 열어 마초에게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마초는 자리를 둘러보았지만 관우와 장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칼을 쥔 채 유비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라며 다시는 유비의 자를 부르지 않았다.

마초는 유비가 유장을 칠 때 합류했으니 다른 장수들에 비해 한참 늦게 왔고 또 투항해온 몸임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자를 부를 정도였다면 공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비가 황제로 등극한 이듬해인 222년 마초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47세였다. 임종할 즈음에 소를 올려 말했다.

저희 집안의 2백여 명은 조맹덕(조조)에게 주살당하여 거의 전멸되었고 오직 사촌 동생 마대(馬岱)만이 있을 뿐입니다. 쇠락한 집안의 제사를 이을 사람이니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하후연의 목을 벤 노익장 황충

  황충도 뒤늦게 유비 진영에 합류한 노장이다. 황충은 본래 유표의 부하였다. 유비가 남쪽의 여러 군을 평정하자 그에게 귀순했다. 황충도 마초처럼 유장을 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건안 24(219) 황충은 한중에서 조조의 맹장 하후연을 무찔러 전세가 역전되어 유비가 이길 수 있었다. 이해에 유비는 한중왕이 되자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용하려고 했다. 유비 진영에 썩 후에 합류한 사람들을 크게 예우하면 관우의 질투를 살까봐 제갈량이 은근히 걱정되어 유비에게 귀뜸했더니 유비가 말했다.

제가 직접 관우에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 무리에는 어느 곳이든지 텃세가 있기 마련이다. 난세에는 충과 의리, 전공, 무리 유지와 발전에 대한 기여도로 직위를 부여 받기 때문에 질투가 없을 리가 없다. 문신과 무신 사이 질투, 문신 내의 질투, 무신 내의 질투 등 끝없는 질투가 이어진다. 군주가 가장 난감한 것이 바로 그 수많은 신하들에게 적재적소의 직위를 주어 능력을 발휘하게끔 하는 것이다. 만약 군주가 원칙을 벗어나 편애하거나 냉철한 판단이 없이 기분으로 직위를 남발하면 질투가 생기게 마련이고 질투하는 자는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

유비 진영에서 텃세가 가장 심한 것은 당연히 관우와 장비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줄곧 유비를 모셔왔기 때문에 후에 가담한 사람들이 자기네를 초월하면 곧바로 질투한다. 제갈량 때부터 이미 이런 조짐이 나타났었다. 결국 군주의 조절 능력과 화해 능력에 의해 갈등이 최소화 된다. 유비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어 늘 두 사람을 설득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황충은 유비의 뜻대로 관우 등과 지위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무사의 모델 조운

  조운은 키가 8척이며 자태와 안색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조운은 본래 원소의 세력 범위 내인 고향 상산군(常山郡)에서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 무렵 원소는 기주목이라 일컫고 있었다. 조운은 관민의 용병을 이끌고 공손찬이 있는 동북쪽에 갔다. 당시 공손찬과 원소는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키려 안달이 나 있었다. 공손찬은 주()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므로 매우 걱정했는데 조운이 자신에게 오자 기뻐하면서도 떠보려고 말했다.

듣자하니 당신네 주의 사람들은 모두 원씨를 따르고 싶어 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혼자 마음을 돌려 미혹되게 정도에서 돌아올 수 있었소?”

조운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천하가 흉흉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며 백성은 눈앞에 액운을 걸어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저희 주의 의견은 인자하게 다스리는 쪽을 따르지 원공(袁公)을 경시하고 명장군(明將軍)을 따르려는 게 아닙니다.”

그 무렵 유비도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늘 조운을 믿었고 조운 역시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조운은 형이 죽어서 공손찬을 떠나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비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운은 인사하면서 말했다.

절대로 은덕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유비가 원소에게 의지하자 조운은 업으로 가서 유비를 만났다.

유비는 너무 기뻐 조운과 한 침대에서 잘 정도였다고 한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와도 한 침대에서 잤다고 하는데 아마 난세의 군주는 부하들과의 스킨십이 필요했던 것 같다. 조조가 외출할 때 유비와 같은 수례를 탔다고 하고 밥 먹을 때, 회의 할 때도 유비와 자리를 나란히 했다고 하는데 조조가 유비와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늘은 순욱, 내일은 곽가, 모레는 하후연 등등과 이런 식으로 친밀함을 과시했을 것이다.

유비와 조운의 관계는 진짜 돈독했던 것 같다. 따라서 조운은 유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쫓길 때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진수의 <삼국지>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조운전에도 이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버리고 간 아들 유선과 감부인을 조운이 대군의 포위를 뚫고 구출해서 유비와 만났다. 사서에는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연의>는 이 대목을 과장하여 유비가 어린 유선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말한다.

너 때문에 아까운 장수를 잃을 뻔 했다.”

이 말을 들은 조운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맹세한다.

소설의 이 부분 때문에 조운이 삼국시대 장수 중 가장 멋있고 가장 충과 의를 다 하는 사나이로 독자들에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사무라이 문화에 물젖은 일본인이 조운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소설의 이 부분 때문이다.

김 정 룡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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