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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을 벗어난 남영전의 토템설

기사승인 [416호] 202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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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을 벗어난 남영전의 토템설

요즘 조글로에 남영전 선생의 토템설이 시리즈로 등장하고 있는데 토템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은 그렇거니 하고 읽겠지만 토템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고 심지어 오류투성이어서 거부감마저 들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토템으로 인해서 인류문화가 생겼다?>

남영전 선생은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는 문화가 생겼다고 주장하는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토템 이전에는 문화가 없었다는 얘기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국가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라 부르는데 선사시대를 원시공동체사회, 모계씨족사회, 부계씨족사회, 부락(부족)사회, 부락(부족)연맹사회 등으로 나눈다. 이 다섯 가지 사회에는 각각 대표자가 있었는데 원시공동체 대표자는 이브, 모계씨족의 대표자는 여와, 부계씨족의 대표자는 복희, 초기부락사회의 대표자는 염제, 후기부락사회 대표자는 황제, 부력연맹의 대표자는 요와 순이다.

토템이 언제 생겨났을까?

토템은 부족시대에 생겨났고 부족연맹시대에 자리매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토템의 탄생이 왜 하필이면 그때일까?

원시공동체사회의 인류가 거둔 가장 큰 성과라면 바로 직립이다. 직립은 서로 마주볼 수 있어 소통에 큰 기여를 하였고 여러모로 삶의 큰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한 가지 예만 든다면 인류는 서로 마주보면서 성생활을 하기 때문에 성적 즐거움이 기타 동물에 비할 수 없이 발달하였고 급기야 후대번식을 위해 행하던 성교가 성문화로 진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계씨족사회 가장 큰 문화적인 특징을 꼽으라면 곧 생식숭배이다. 당시 전쟁에 죽고, 질병에 죽고, 기아에 죽고, 자연재해에 죽고 해서 인류의 생존율은 30%미만이었고 평균수명은 15세 정도였다. 그래서 종족보존이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가항력적인 요소와 맞서 싸워봐야 패배가 너무 빤하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는 방법을 택했다. 다산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식을 숭배해야 한다. 이로서 인류사회는 생식숭배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유명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역사를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 등 네 가지 단계로 나눈다. 그는 인지혁명은 인간의 뒷담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뒷담화의 주요 화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인데 이를 믿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서로 협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뒷담화의 주요 화젯거리는 무엇이었을까? 생식숭배가 주요 화젯거리였고 구체적으로는 특정물에 제사를 올리고 기도하면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다는 상상이 생겨났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바로 생식숭배의식이었다. 예를 들어 다산의 상징물을 찾아 제사 올리고 기도하였는데 그 상징물 대상이 바로 일차적으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외형상 여성을 상징하고 출산율 또한 으뜸이다. 연애편지를 어서(漁書)’, 귀부인이 타는 가마를 어가(漁駕)라 부르고 지금도 중국인은 설이 오면 주련에 연연유여(年年有餘)’라는 글귀를 써 붙이는데 여기서 ()’는 본래 물고기를 뜻하는 ()’였다. 한문에서 는 동음이다. 다음 단계는 개구리 숭배였다. 개구리는 하루아침 봄비에 수만 개의 알을 생산하여 다산의 상징이다. 또 개구리 배가 불고 주는 현상이 마치 여성의 임심과 출산과 닮았다. 달 속의 상아는 개구리의 화신이며 생식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생식숭배가 당시 문화의 중추였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그래서 모계사회였고 이 시기에는 아주 평화로웠다.

여성의 숭배는 다산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점차 임신에 있어서 남성의 역할이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잉여생산물이 생겨남에 따라 힘의 상징인 권력이 생겨나게 되고 농경이란 남성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모계사회는 붕괴되고 부계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계사회 초기에는 모계처럼 씨족사회였다. 씨족사회의 특징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인간이 모여 사는 것이다. 그런데 씨족과 씨족 간에 먹고 먹히는 전쟁이 끊이지 않아 부족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부족사회의 특징은 바로 혈연관계가 서로 다른 인간들이 모여 생활을 도모하다 보니 단합이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바로 우리는 같은 조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관념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그 조상이 무엇이냐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혈연관계 인간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상징물여야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족집단에 따라 양, , 독수리, 승냥이, , 곰 등등이었는데 역사에서는 이 상징물들을 토템이라 부른다.

토템이란 바로 이렇게 생겨났던 것이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토템이 있어서 문화가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문화는 있었다. 그러므로 토템이 마치 문화의 기원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남영전 선생의 주장은 너무 어처구니없다.

중국역사를 문화적인 시각에서 나눈다면 생식숭배(모계와 부계 씨족사회), 토템숭배(부족과 부족연맹사회), 조상숭배(국가 탄생 이후) 3단계이다. <생식숭배문화사상>의 저자 조국화 선생은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를 핵심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토템 이전에 이미 중국문화의 골격이 세워졌다는 뜻이다.

< 토템에 의해 성씨가 생겨났다?>

성은 토템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있었다. 앞서 글(단군의 성이 왕가? 동화 같은 얘기)에서 밝혔듯이 성은 여()가 생()한 것에서 유래되었던 것이지 토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계의 성을 따른 지도 수천 년이 되지만 여성이 낳는다는 뜻인 성()이란 한문이 변하지 않는 데는 그만큼 역사적인 문화뿌리가 깊었기 때문이다. 만약 남영전 선생의 주장대로 성이 토템에 의해 생겨났다면 토템은 남성숭배이기 때문에 성이란 글자는 남()과 생() 합쳐진 글자여야 한다.

옛날의 성인인 황제는 성이 황()가 아니라 희()였다. 왜냐면 황제의 어미가 희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천자문 식으로 곧잘 말하는 계집 ()’는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이 있다. 여자들의 이름에 희()자가 많이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황제의 어미가 용모가 뛰어나서 황제의 성을 희()라고 지었다는 설도 있긴 한데 별로 설득력이 없다. 역시 그의 어미가 살았던 희수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염제의 성이 강()인 것이 양치기 무리에서 탄생되어 성을 강()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는데 역시 설득력이 없다. 정확한 것은 역시 염제의 어미가 강수(羌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주지에 따라 지은 것이다. 순임금이 성이 요()인 것도 그의 어미가 요허(姚墟)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아니라 귀족들도 모두 그의 어미가 산 지명에 따라 성이 주어졌던 것이다. 백성은 물론 성이 없었다.

만약 성이 토템에 의해 생겨났다면 염제의 토템이 중원에 진출한 후 소로 바뀌었고 염제를 신농이라 하는데 농경의 신이라면 당연히 그의 토템은 소여야 하고 따라서 그의 성도 우()여야 맞다. 그런데 그의 성은 그의 토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황제의 토템은 곰이었다. 그래서 그를 유웅씨(有熊氏)라 불렀다. 만약 성이 토템에 의해 생겨난 것이 맞다면 황제의 성은 웅()이어야 하고 남영전 선생이 단군의 성을 왕이라 주장하는 것처럼 추리한다면 황제의 성이 왕가여야 한다.

치우라는 호칭은 성이 치이고 이름이 우인지, 아니면 그 집단을 부르는 상징적인 기호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는 고문에서 뱀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를 치우라 부르는 것은 일설에 의하면 뱀이 많이 사는 곳에서 왔기 때문에 치우(蚩尤, 는 대물이라는 뜻)’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의 성이 토템에서 왔다는 설은 없다.

부족연맹시대에 숱한 씨족이 부족이 되었고 숱한 부족의 우두머리들을 부르는 하나의 기호가 성이였는데 국가 탄생 이후 대통합이 이뤄지고 특히 한나라 때 본래 씨족과 부족의 기호였던 성들이 줄어서 470여개로 남았는데 이 모든 성들을 일일이 따져보아도 토템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절대다수가 조상의 거주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간의 성이 거주지에서 유래된 전형적인 사례로서 일본을 들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의 성은 22만개 정도 되는데 절대다수가 산언덕에 있는 밭이란 뜻으로 야마다(山田), 높은 다리 있는 동네에서 살았다 하여 다카하시(高橋), 솔나무 밭이란 뜻으로 마쯔다(松田), 섬과 개울물이란 뜻으로 시마즈(島津) 등등 조상이 살았던 자연의 생김새에 따라 지은 것이다. 간혹 엉뚱한 성이 있긴 하다. 예하면 이누카이(犬飼)라는 성이 있는데 만약 우리민족이 이런 성을 가지라면 기절초풍할 것이지만 일본인은 자랑스럽게 간주하고 있다. 대대로 사냥개를 길러 사무라이에게 바친 직업을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본은 잡귀, 잡신을 믿는 나라이고 8만여 개 신이 존재하는 나라로서 그들도 토템사상이 강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성은 토템과 전혀 관련이 없이 자연의 생김새 즉 조상의 거주지를 성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부계시대에 진입하여 남성을 상징하는 뱀, , 태양 등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이 공동의 토템으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만약 성이 토템에 의해 생겨났다면 인간의 성이 다수가 뱀, , 태양을 뜻하는 사(), (), ()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었다?> 

남영전 선생은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역사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왜냐면 인류역사는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에로 진화하였고 토템은 부족사회에 이르러 생겨났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토템씨족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토템이란 말이 정확한 개념일 뿐 토템부족이란 말도 어폐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류역사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원시공동체씨족부족민족으로 흘러왔는데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토템이 친척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토템을 토대로 민족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한족(漢族)이란 그 많은 인구가 모두 친척이다? 물론 중화민족의 공동토템이 용이었다고 하지만 용을 공동토템으로 했기 때문에 한족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민족이란 혈연의 관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매개로 이뤄진 것이다. 이 문화 속에 용이란 공동토템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중화민족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 아니다.

<장자, 맹자 기원 전 5, 6세기 사람?>

남영전 선생 왈, “기원전 5, 6세기 세계적으로 인류역사 발전을 보게 되면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 다섯 명의 성인이 출현했습니다. 노자, 장자, 공자, 맹자, 그리고 인도의 석가모니 이렇게 다섯 명의 성인이 나타났습니다.”

장자는 BC 369~ BC 289년경, 맹자는 BC 372년 추정 ~ BC 289년 추정이다. 두 사람 모두 4세기 태어나 3세기 초까지 살았다. 학술과 관련된 글은 두루뭉술하지 말고 정확해야 하는데 이 두 사람을 공자와 노자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어폐가 있다. 학자의 신분으로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세계적으로 성인, 현인들이 대거 출현했던 것은 사실이다. 독일철학자 야스퍼스는 이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이 있어 이 시대가 주목받아온 것은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사서술은 정말 세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어지간히 두루뭉술하게 서술하는 것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치우 때 철기가 등장했다?>

고대 중국에서 염제, 황제와 치우 이 세 개 부락이 있을 때 강대하였습니다. 지금 봐서 알겠지만 그때 5천 년 전에 치우가 전문 군대를 길렀기 때문에 중국이 옛날에 강대하였습니다. 그때 중국은 이미 철과 동으로 예리한 병기를 만들었습니다.” 남영전 선생의 말이다.

이 말에 무슨 오류가 있는지?

그리스의 헤시오도스와 로마의 오비디우스는 둘 다 자신들이 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 시대는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기시대로 구분했다. 가장 좋은 시대인 황금시대에는 인류가 행복하고 고귀했으며 사회도 공평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은의 시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인류는 더 이상 착하거나 천진하지 않았다. 또 청동시대는 매일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신앙과 신성이 아직까지는 남아 있었다. 문제는 혼란한 철의 시대였다. 인류는 잔인하고 탐욕스럽게 변해 서로 불신하고 신앙도 없으며 겸손과 충성스러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금, , 동의 역사적인 발명의 순서이고 철의 발명이 가장 늦은 것이다. 기원전 12세기 다른 대륙에서 이미 철을 발명했다고 하는데 중국의 경우는 철기의 사용이 춘추시대인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한반도의 경우는 철의 사용이 기원전 3세기로 보고 있다. 물론 북한에서는 철의 사용을 기원전 8세기라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중국보다 앞섰다는 얘기인데 역사와 맞지 않는다.

중국은 전국시대 들어 병기뿐만 아니라 철제농기구가 발달하여 농업이 전례 없이 발전하여 신흥지주계급이 새로 탄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치우 때 철로 예리한 병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김정룡 기자 jzl09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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